상자를 들이던 밤
The Boxes by the Door
이사한 지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민수의 짐은 아직 상자째 앞에 쌓여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하루면 다 풀 짐이었지만, 그는 좀처럼 상자를 열지 않았다.
그것은 오랜 생활이 몸에 남긴 버릇이었다.
남의 집을 옮겨 다니는 동안, 그는 언제든 다시 떠날 수 있도록 짐을 늘리지 않는 법을 익혔다.
이번 집도 결국 이 년짜리 일 뿐이라고, 그는 스스로에게 말하곤 했다.
그래도 이사 온 첫날, 이삿짐 트럭이 떠나자마자 그는 부터 꺼내 방 안을 구석구석 밀었다.
살림살이는 늘리지 않으면서도, 걸레로 바닥을 닦고 방 구석의 먼지까지 또 치웠다.
벽에 붙은 낡은 만은 반쯤 뜯다가 그만두었는데, 앞사람이 걸어 두었던 자리가 네모나게 하얗게 남아 있었다.
Checkpoint quiz
3 questions on Part 1
다음 날 새벽, 민수는 판도 없이 방바닥에 윗도리를 펼쳐 놓고 다리미로 주름을 폈다.
어차피 그의 하루는 대부분 회사 에서 흘러갔고, 집은 잠만 자는 곳에 가까웠다.
냉장고나 세탁기 같은 도 매장에서 몇 번 구경만 하고는 그냥 돌아서곤 했다.
제대로 살림을 갖추는 일이, 왠지 남의 삶을 사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작은 냉장고 하나와 얻어 온 전기 주전자면, 잠시 머무는 살림으로는 충분했다.
그날 저녁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 새 동네는 지낼 만하냐고, 이번에는 좀 자리를 잡을 거냐고 물으셨다.
민수는 괜찮다고, 이만하면 됐다고 대답했지만, 정작 어머니가 진짜 묻는 것에는 답하지 않았다.
Checkpoint quiz
3 questions on Part 2
그날 밤, 비가 세차게 쏟아지며 을 두드렸다.
이 하얗게 번쩍이고, 곧 커다란 가 하늘을 가르자 온 집 안의 불이 툭 꺼져 버렸다.
어둠 속에서 초를 더듬어 찾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고, 나가 보니 아주머니가 촛불 하나와 을 들고 서 있었다.
아주머니는 "이 건물은 비만 오면 이 내려가요. 하나도 무서워할 것 없어요"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주머니가 따라 준 는 미지근했지만, 한 모금 넘기자 이상하게 긴장이 풀렸다.
아주머니는 예전에 이 골목에 이 참 많았다고 했다.
자기도 아래층에서 삼십 년 넘게 그중 하나를 했는데, 지금 그 자리는 편의점으로 바뀌었다며 아쉬워했다.
아주머니는 그의 직장이 어디냐고는 묻지 않고, 그저 여기서 잠은 잘 자냐고만 물었다.
아주머니는 잔을 비우고 일어서며, 다음에 또 차나 한잔하자고 했다.
아주머니가 돌아가고 나서, 민수는 한참을 그대로 서 있다가 앞의 상자들을 하나씩 안으로 들여놓기 시작했다.
앞사람이 남긴 하얀 자국은, 이번엔 지우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이 집은 여전히 이 년짜리 였지만, 오늘 밤만큼은 처음으로 '내 집'처럼 느껴졌다.
Checkpoint quiz
4 questions on Part 3
Vocabulary
Grammar notes
이삿짐 트럭이 떠나자마자 그는 청소기부터 꺼냈다.
The moment the moving truck pulled away, he dug out the vacuum before anything else.
어머니가 이번에는 좀 자리를 잡을 거냐고 물으셨다.
His mother asked whether this time he might settle down a little.
아주머니는 예전에 이 골목에 다방이 참 많았다고 했다.
The lady said this alley had once been full of tea rooms.
아주머니는 다음에 또 차나 한잔하자고 했다.
The lady said they ought to have tea together again sometime.
온 집 안의 불이 툭 꺼져 버렸다.
Every light in the flat went out with a sn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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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questions on the whole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