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 없는 저녁상

TOPIK 4#26 · Food & cooking

심판 없는 저녁상

A Supper Without a Verdict

Part 1

골목 끝, 낡은 세탁소가 있던 자리에는 지금 작은 부엌이 들어서 있다.

이곳이 언제부터 ’라 불릴 만한 곳이 되었는지는, 사실 누구도 잘라 말하지 못한다.

분명한 것은 시작이 무슨 거창한 뜻이 아니라, 무더기의 이었다는 사실이다.

몇몇 이웃이 매주 병과 캔을 내다 놓고 함께 분리하다 보니, 어느새 서로 얼굴을 익히게 되었다.

끈으로 묶고 사소한 손놀림이, 실은 사람과 사람을 엮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던 어느 봄, 민재가 이왕이면 이웃과 저녁까지 지어 먹자고 제안하면서 지금의 저녁 모임이 .

첫날 저녁상에 둘러앉은 사람은 겨우 다섯이었다.

그런데도 낯선 이들 사이에는 이상할 정도로 따뜻한 공기가 돌았다.

서로의 하루를 묻고 들어 주는 동안, 자리는 조금씩 단순한 ‘모임’ 이상의 무엇이 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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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2

모임이 입소문을 타고 커지면서, 뜻하지 않은 불거졌다.

스무 명을 넘어선 데다가 물가마저 올라, 재료비를 어떻게 감당할지가 문제였다.

씨는 팔짱을 끼고 앉아, 공평하려면 기준부터 세워야 한다고 잘라 말했다.

오늘 저녁만 해도 열몇 가지 재료가 들어갔으니, 각자 먹은 만큼 내는 것이 이치에 맞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형편이 어려운 이웃이 계산 앞에서 느낄까 걱정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아이를 혼자 키우는 수미는, 먹으러 와서 형편을 증명해야 하는 처지가 했다.

씨의 말투는 흡사 법정에서 그것이어서, 몇몇은 은근히 마음이 상했다.

의견은 좀처럼 않았고, 말까지 거칠어지자 애써 저녁상의 온기가 차갑게 식는 같았다.

민재는 어느 한쪽 편도 들지 않고, 양쪽의 말에 번갈아 가며 조용히 귀를 .

그는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일보다, 식탁에서 아무도 밀려나지 않는 일이 급하다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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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3

말을 자르고, 민재는 잠자코 앞치마를 둘렀다.

그날 저녁 메뉴는 치즈를 듬뿍 넣은 감자탕이었다.

그가 커다란 냄비에 치즈를 천천히 , 고소한 냄새가 좁은 부엌을 가득 메웠다.

냄새는 다투느라 잊고 있던 사람들의 슬그머니 .

솥의 밥을 나누다 보면 미운 마음도 풀리기 마련이라고, 민재는 믿는 편이었다.

정말로, 국물이 뜨거울수록 굳어 있던 표정들이 조금씩 .

오래 없다던 옆집 할머니마저 그릇을 비웠다.

누군가 “이러다 망가지겠네” 하고 웃음을 터뜨리자, 식탁 여기저기서 낮은 웃음이 번졌다.

조금 전까지 날을 세우던 사람들이, 같은 냄비에 숟가락을 담그며 국물을 나누고 있었다.

밥을 나누는 단순한 행위가, 오래 묵은 소리 없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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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4

배가 부르자 언성은 절로 낮아졌고, 그토록 사나웠던 재료비 문제도 뜻밖에 싱겁게 풀렸다.

있는 사람은 형편껏 내고, 어려운 사람은 다음에 설거지로 갚기로 하자는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놀랍게도, 가장 씨가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를 것이 아니라 그저 아무도 손해 보지 않기를 바랐을 뿐이라고, 그는 짧게 덧붙였다.

오랜 세월 남을 자리에 앉아 그에게도, 저녁상은 낯설고 따뜻한 배움이었던 모양이다.

식사를 마친 사람들은 남은 깔끔하게 나누어 묶었다.

며칠 골목 가게 앞에서, 씨가 수미의 밀린 말없이 대신 치르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예전 같았으면 에서 눈길 주고받지 않았을 사이였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함께한 저녁 끼뿐이었지만, 골목의 공기는 분명히 달라져 있었다.

그렇게 작은 안에서, 누가 옳은지 가리는 형편을 캐묻는 없이, 사람들의 마음은 어느새 하나로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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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cabulary

Grammar notes

-(으)ㄴ/는 데다가on top of, in addition to (a stacked reason)

참석자가 스무 명을 넘어선 데다가 물가마저 올랐다.

On top of the attendees passing twenty, prices too had risen.

조차/마저even (the last or least-expected thing)

오래 식욕이 없다던 옆집 할머니마저 두 그릇을 비웠다.

Even the grandmother next door, long without appetite, emptied two bowls.

만 해도take ... alone (as one example); just ... by itself

오늘 저녁만 해도 열몇 가지 재료가 들어갔다.

Tonight's supper alone took over a dozen ingredients.

-(으)ㄹ수록the more ..., the more ...

국물이 뜨거울수록 굳어 있던 표정들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The hotter the broth, the more the stiffened faces eased.

-기 마련이다is bound to happen, naturally follows

한 솥의 밥을 나누다 보면 미운 마음도 풀리기 마련이다.

Share one pot of rice and even hard feelings are bound to come lo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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