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옆의 빈자리

TOPIK 4#31 · Travel & place

이름 옆의 빈자리

The Empty Space Beside My Name

Part 1

할아버지는 평생 세계를 떠돌아다닌 이름난 였지만, 손녀인 나는 내가 사는 동네를 벗어나는 것조차 버거워하는 사람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나는 정리한다는 핑계로 그의 낡은 서재를 며칠이나 .

오래된 책들 사이를 더듬던 손끝에, 손바닥만 가죽 하나가 걸렸다.

표지에는 그가 칼끝으로 짧은 있었다.

"길을 잃더라도 걸음은 남는다." 나는 줄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어릴 적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 말이었지만, 나에게는 집을 자주 비우는 사람의 그럴듯한 변명처럼 들렸다.

할아버지는 곳은 밟아 진짜 였고, 한곳에 오래 머무는 법이 없었다.

집을 비운 할아버지를 기다리던 어린 나에게, 그의 여행은 일종의 느껴지곤 했다.

안쪽에는 그가 끝내 보지 못한 마지막 곳이 적혀 있었고, 옆에는 뜻밖에도 이름이 나란히 쓰여 있었다.

언젠가 그가 함께 그곳에 가자고 했을 때, 나는 부질없는 걸음이라며 매몰차게 거절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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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questions on Part 1

Part 2

장례를 치르고 얼마 뒤, 나는 할아버지가 끝맺지 못한 여행을 대신 마음먹었다.

그것이 그를 기리는 일인지, 아니면 뒤늦은 사과인지 나조차 분명히 없었다.

꼼꼼히 적힌 준비물 하나씩 확인하며 꾸리는 동안, 나는 아니라 그저 그의 목록을 뒤따르는 사람일 뿐이었다.

수첩 귀퉁이에는 "여행은 몸에도 마음에도 일이다"라는 그의 단정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아래에는 "몸은 고될지라도 위에서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법이다"라고 덧붙여 있었다.

서울에서 기차를 번이나 갈아타야 했는데, 디딜 없이 붐볐다.

출구를 알리는 표지판을 번번이 놓치고는, 똑같은 지하 통로를 되짚으며 한참을 .

걸음도 예정 없이는 내딛지 못하는 내게, 길을 잃는다는 것은 자체로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나는 애써 할아버지의 걸음걸이를, 그리고 표지에 줄을 떠올렸다.

숨을 천천히 고르자 조급하던 마음도 조금씩 가라앉았고, 어쩌면 길을 잃는 것도 걸음의 부분인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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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3

반나절을 넘게 달려 마침내 닿았을 때, 눅눅한 바다 냄새가 나를 먼저 맞았다.

마을 한쪽으로는 언덕 까지 이어지는 널찍한 뻗어 있었고, 뒤로는 바다까지 구불구불 좁은 흙길이 있었다.

낯선 여행자에게도 마을 사람들은 스스럼이 없어서, 할머니는 나를 툇마루에 무언가를 내오려 부엌으로 들어갔다.

잠시 할머니가 내온 것은 김이 오르는 그릇이었는데, 뜨끈한 국물에 낯선 스르르 풀렸다.

마을 흙길로는 들이 생선 상자를 항구까지 없이 있었다.

나도 상자 하나를 어깨에 걸치고 그들의 걸음을 뒤따랐는데, 남의 짐을 대신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지친 아이를 업고 오르막을 오르던 안쓰러워, 나는 아이를 잠시 목말 태워 언덕을 넘었다.

어머니 말로는, 할아버지는 매끈한 보다 이런 흙길이야말로 진짜 길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고 한다.

언덕 에는 값비싼 차들이 드나들었지만, 정작 바다의 살림을 나르는 것은 흙길 위의 굽은 등들이었다.

그렇게 함께 걷다 보니, 나는 만에 처음으로 시간을 헤아리는 일을 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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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4

수첩에 그려진 그림과 똑같이, 마을이 끝나는 곳에는 하얀 우뚝 있었다.

그가 남긴 마지막 임무는, 오르는 골목 어귀의 낡은 에서 자루를 사는 일이었다.

나는 펜으로 수첩의 마지막 장, 이름 옆에 그가 끝맺지 못한 문장을 마저 넣었다.

평생을 미뤄 그의 꿈이, 한때 그를 매몰차게 돌려세웠던 손녀의 발걸음으로 뒤늦게 있었다.

떠나오던 아침만 해도, 나는 길을 잃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하던 사람이었다.

돌아오는 길, 그토록 나를 했던 이제는 조금도 낯설지 않았다.

나는 창가에 몸을 기대고 지나온 길을 하나하나 떠올렸는데, 모습은 어딘가 할아버지를 닮아 있었다.

"길을 잃더라도 걸음은 남는다"— 이제 변명이 아니라, 곱씹을수록 옳은 말로 다가왔다.

길을 잃고 걸음들이 결국 나를 할아버지에게로 데려다준 셈이었다.

이제 낡은 수첩의 다음 장은, 나도 모르는 사이 작은 되어 버린 내가 채워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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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cabulary

Grammar notes

-더라도even if, no matter whether — concedes a hypothetical and pushes on

길을 잃더라도 걸음은 남는다.

Even if you lose your way, the steps remain.

-(으)ㄹ지라도even though, granted that — a formal, literary concessive

몸은 고될지라도 길 위에서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Though the body may tire, on the road the heart grows all the lighter.

-(으)ㄹ 뿐이다merely, nothing more than — X and nothing else

나는 여행가가 아니라 그저 그의 목록을 뒤따르는 사람일 뿐이었다.

I was no traveler but merely someone trailing after his list.

(이)야말로this precisely, this and nothing else — singles a thing out for emphasis

이런 흙길이야말로 진짜 길이다.

A dirt path like this is precisely the real road.

만 해도just ... alone; take ... for example — one instance stands for the whole

떠나오던 날 아침만 해도, 나는 길 잃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던 사람이었다.

Just on the morning I set out, I was the person who feared getting lost most of 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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