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옆의 빈자리

이름 옆의 빈자리 The Empty Space Beside My Name

Part 1

할아버지는 평생 세계를 떠돌아다닌 이름난 였지만, 손녀인 나는 내가 사는 동네를 벗어나는 것조차 늘 버거워하는 사람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나는 정리한다는 핑계로 그의 낡은 서재를 며칠이나 .

오래된 책들 사이를 더듬던 손끝에, 손바닥만 한 가죽 하나가 걸렸다.

표지에는 그가 칼끝으로 한 자 한 자 짧은 가 있었다.

"길을 잃더라도 걸음은 남는다." 나는 그 한 줄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어릴 적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 온 말이었지만, 나에게는 늘 집을 자주 비우는 사람의 그럴듯한 변명처럼 들렸다.

할아버지는 곳은 다 밟아 본 진짜 였고, 한곳에 오래 머무는 법이 없었다.

집을 비운 할아버지를 기다리던 어린 나에게, 그의 여행은 일종의 느껴지곤 했다.

안쪽에는 그가 끝내 가 보지 못한 마지막 한 곳이 적혀 있었고, 그 옆에는 뜻밖에도 내 이름이 나란히 쓰여 있었다.

언젠가 그가 함께 그곳에 가자고 했을 때, 나는 부질없는 걸음이라며 매몰차게 거절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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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2

장례를 치르고 얼마 뒤, 나는 할아버지가 끝맺지 못한 그 여행을 대신 마음먹었다.

그것이 그를 기리는 일인지, 아니면 뒤늦은 사과인지 나조차 분명히 알 수 없었다.

에 꼼꼼히 적힌 준비물 하나씩 확인하며 꾸리는 동안, 나는 가 아니라 그저 그의 목록을 뒤따르는 사람일 뿐이었다.

수첩 한 귀퉁이에는 "여행은 몸에도 마음에도 일이다"라는 그의 단정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그 아래에는 "몸은 고될지라도 길 위에서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법이다"라고 덧붙여 있었다.

서울에서 기차를 두 번이나 갈아타야 했는데, 첫 은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출구를 알리는 표지판을 번번이 놓치고는, 똑같은 지하 통로를 되짚으며 한참을 .

한 걸음도 예정 없이는 내딛지 못하는 내게, 길을 잃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나는 애써 할아버지의 걸음걸이를, 그리고 표지에 그 한 줄을 떠올렸다.

숨을 천천히 고르자 조급하던 마음도 조금씩 가라앉았고, 어쩌면 길을 잃는 것도 걸음의 한 부분인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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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3

반나절을 넘게 달려 마침내 닿았을 때, 눅눅한 바다 냄새가 나를 먼저 맞았다.

마을 한쪽으로는 언덕 위 까지 이어지는 널찍한 가 뻗어 있었고, 그 뒤로는 바다까지 구불구불 좁은 흙길이 나 있었다.

낯선 여행자에게도 마을 사람들은 스스럼이 없어서, 한 할머니는 나를 툇마루에 무언가를 내오려 부엌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할머니가 내온 것은 김이 오르는 국 한 그릇이었는데, 뜨끈한 국물에 낯선 스르르 풀렸다.

마을 뒤 그 흙길로는 들이 생선 상자를 항구까지 쉴 새 없이 있었다.

나도 상자 하나를 어깨에 걸치고 그들의 걸음을 뒤따랐는데, 남의 짐을 대신 져 본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지친 아이를 업고 오르막을 오르던 한 이 안쓰러워, 나는 그 아이를 잠시 목말 태워 언덕을 넘었다.

어머니 말로는, 할아버지는 저 매끈한 보다 이런 흙길이야말로 진짜 길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고 한다.

언덕 위 에는 값비싼 차들이 드나들었지만, 정작 바다의 살림을 나르는 것은 흙길 위의 저 굽은 등들이었다.

그렇게 함께 걷다 보니, 나는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시간을 헤아리는 일을 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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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4

수첩에 그려진 그림과 똑같이, 마을이 끝나는 곳에는 하얀 가 우뚝 서 있었다.

그가 남긴 마지막 임무는, 로 오르는 골목 어귀의 낡은 에서 한 자루를 사는 일이었다.

나는 그 펜으로 수첩의 마지막 장, 내 이름 옆에 그가 끝맺지 못한 문장을 마저 써 넣었다.

평생을 미뤄 온 그의 꿈이, 한때 그를 매몰차게 돌려세웠던 손녀의 발걸음으로 뒤늦게 있었다.

떠나오던 날 아침만 해도, 나는 길을 잃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하던 사람이었다.

돌아오는 길, 그토록 나를 했던 도 이제는 조금도 낯설지 않았다.

나는 창가에 몸을 기대고 지나온 길을 하나하나 떠올렸는데, 그 모습은 어딘가 할아버지를 닮아 있었다.

"길을 잃더라도 걸음은 남는다"— 이제 그 는 변명이 아니라, 곱씹을수록 옳은 말로 다가왔다.

길을 잃고 걸음들이 결국 나를 할아버지에게로 데려다준 셈이었다.

이제 그 낡은 수첩의 다음 장은, 나도 모르는 사이 작은 가 되어 버린 내가 채워 갈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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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cabulary

Grammar notes

-더라도even if, no matter whether — concedes a hypothetical and pushes on

길을 잃더라도 걸음은 남는다.

Even if you lose your way, the steps remain.

-(으)ㄹ지라도even though, granted that — a formal, literary concessive

몸은 고될지라도 길 위에서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Though the body may tire, on the road the heart grows all the lighter.

-(으)ㄹ 뿐이다merely, nothing more than — X and nothing else

나는 여행가가 아니라 그저 그의 목록을 뒤따르는 사람일 뿐이었다.

I was no traveler but merely someone trailing after his list.

(이)야말로this precisely, this and nothing else — singles a thing out for emphasis

이런 흙길이야말로 진짜 길이다.

A dirt path like this is precisely the real road.

만 해도just ... alone; take ... for example — one instance stands for the whole

떠나오던 날 아침만 해도, 나는 길 잃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던 사람이었다.

Just on the morning I set out, I was the person who feared getting lost most of 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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