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그러진 원

TOPIK 5#4 · Travel & place

찌그러진 원

The Dented Circle

Part 1

나는 세상의 모든 여행이 지도 위에서 이미 끝나 있어야 한다고 믿는, 그런 사람이었다.

따라 바퀴 도는 여행은, 전부터 수첩 한구석에 접어 오랜 숙제 같은 것이었다.

지난겨울, 오래 매달려 무언가가 손안에서 허무하게 무너진 뒤로, 나는 이번만은 무엇 하나라도 계획한 그대로 완성하리라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있었다.

겨울이 물러가고 접어들 무렵, 나는 마침내 오랜 숙제를 펼쳐 들었다.

나는 주에 걸쳐 하루하루의 동선을 촘촘하게 .

어느 갈림길을 시에 지날지, 어느 식당에서 끼니를 때울지까지, 지도 위에는 빈틈이라곤 없었다.

이번 여행의 동행은 대학 후배 지수였다.

지수는 어디서든 뭇사람의 시선을 몸에 받는 빼어난 소유자였지만, 정작 본인은 사실에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대신 그녀는 무언가를 흘리고 잊고 다니는, 지독하게 사람이었다.

빈틈없는 나와 빈틈투성이인 그녀가 낡은 대에 나란히 올라탄 것이, 여행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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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2

목적지는 깊은 산자락에 자리 잡은, 이름난 .

그러나 간밤의 비로 해안 도로 구간이 막혀, 우리는 읍내에 세워 두고 시외버스로 갈아타야 했다.

나는 진작 편을 알아 두었지만, 지수가 매표소 앞에서 지갑을 뒤적이며 꾸물대는 바람에 버스를 눈앞에서 놓치고 말았다.

덜컹대는 산굽이를 하나하나 넘는 동안, 나는 어그러진 일정표를 번이나 들여다보며, 놓치지 않았어도 진작 목적지에 닿았으련만 하고 속을 태웠다.

입구에는 정숙을 달라는 팻말이 있었고, 규칙 앞에서라면 마음이 놓이는 나는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마당 한쪽에서는 마리가 말뚝에 매여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지수가 반가운 마음에 성큼 다가서자, 느닷없이 뿔을 앞세우고 사납게 .

비명과 함께 엉덩방아를 찧은 지수와, 그러거나 말거나 되돌아서서 번갈아 보다가, 나는 기어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소동을 뒤로하고, 우리는 전통 공연이 시작되려는 마당의 .

북소리가 울리자 지수는 아팠던 것도 잊은 눈을 반짝였고, 나는 나도 모르게 주머니 일정표를 조용히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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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3

공연이 끝난 뒤, 우리는 마을 어귀에 있는 작은 들렀다.

주인은 낯선 여행객인 우리에게 따뜻한 차부터 내미는 베풀었다.

처음에 나는 지수의 덕이라 여겼지만, 노인의 눈길은 그녀의 얼굴이 아니라 스스럼없는 웃음에 머물러 있었다.

주인은 손수 담근 자랑하는 여간 사람이 아니었다.

년을 꼬박 어둠 속에서 것이라 했다.

좋은 것일수록 서두른다고 되는 법이 없으며 오래 묵혀 제대로 맛이 깊어진다고, 노인은 가만히 어루만졌다.

그러고는 오래 봉해 두었던 하나를 우리 앞에서 조심스레 .

뚜껑을 열자 구수하면서도 알싸한 냄새가 좁은 가게 안에 가득 퍼졌다.

계획표 어디에도 없던 자리가, 나는 왜인지 이번 여행에서 가장 아깝지 않은 시간처럼 느껴졌다.

서두르지 않아야 비로소 깊어지는 것이 어디 뿐이겠느냐 싶어, 나는 슬며시 부끄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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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4

이튿날, 우리는 읍내에 세워 되찾아 다시 남쪽으로 향했다.

지역은 마침 방울 내리지 않는 접어들어, 들판이 온통 누렇게 메말라 있었다.

우리는 계획에도 없이 문득 차를 세우고, 인적 없는 바닷가를 오래도록 .

파도 소리에 걸음을 맞추어 걷다 보니, 어그러진 일정 따위는 어느새 아무래도 좋아져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지수가 물기 어린 바위를 잘못 디뎌 절벽 쪽으로 미끄러지고 말았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으나, 발목을 혼자서는 몸을 일으키지도 못했다.

머릿속을 빼곡히 채우고 있던 계획표가 일순 하얗게 지워지고, 나는 처음으로 아무것도 통제할 없다는 사실 앞에 얼어붙었다.

떨리는 손으로 구조대에 신고를 하자, 다행히 대원들이 지체 없이 주었다.

가파른 벼랑길을 되짚어 올라온 구조대 덕분에, 지수는 무사히 병원으로 옮겨졌다.

정작 응급실 침대에 누운 지수는, 겁에 질린 나를 올려다보며 예정에도 없던 구경 실컷 했다고 도리어 농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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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5

밤바람은 제법 쌀쌀했지만, 지수의 발목은 예상보다 빨리 아물었다.

우리는 남은 그녀의 걸음에 맞추어 느슨하게 고쳐 잡고, 해안 도시의 찾았다.

유리 터널 속을 걷자니, 마치 깊은 밑바닥을 거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이 바위틈을 자유로이 모습을, 지수는 짚은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저들에게는 정해진 동선도, 놓쳐서는 편도 없겠구나 싶어 나는 나직이 웃고 말았다.

저녁이 되자 우리는 바닷가의 작은 민박집에 느긋하게 .

지도 위에 그려 완벽한 원은 여기저기 찌그러졌지만, 우리는 어쨌든 바퀴 돌아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그대로 이룬 아니었으되, 어쩌면 그래서 완성에 가까운 일주였는지도 모른다.

친구가 흩뜨려 놓은 모든 이야말로, 두고두고 곱씹게 여행의 진짜 무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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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cabulary

Grammar notes

-(으)리라shall / would surely (do) — a literary resolve or conjecture

나는 이번만은 무엇 하나라도 계획한 그대로 완성하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I had resolved that this time, at least, I would carry even one thing through exactly as I had planned.

-(으)련만it would surely be so, and yet — a wistful counter-to-fact

직행만 놓치지 않았어도 진작 목적지에 닿았으련만.

If only we had not missed the express, we would surely have arrived long ago.

-(으)ㄴ 채(로)while remaining in a certain state; with something left as it is

지수는 목발을 짚은 채 물고기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Jisu gazed at the fish for a long while, still leaning on her crutches.

-(으)ㄴ/는 듯(이)as if, seemingly — conveying a resemblance or impression

유리 터널을 걷자니 깊은 해저의 밑바닥을 거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Walking through the glass tunnel, I felt as though I were strolling across the floor of the deep seabed.

-(으)ㄹ지도 모르다might, may (be) — a hedged possibility

어쩌면 그래서 완성에 더 가까운 일주였는지도 모른다.

Perhaps, for that very reason, it was a circuit closer to complete.

-고 말다to end up doing something, often unintentionally or to one's regret

나는 기어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In the end I burst out laughing in spite of my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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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questions on the whol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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