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타리 안의 자리

TOPIK 5#25 · Slice of life

울타리 안의 자리

A Place Inside the Fence

Part 1

지훈은 남부럽지 않은 오른, 누구보다 성실한 회사원이었다.

그러나 마흔을 앞둔 어느 겨울, 그는 사직서의 난에 줄만을 적어 넣었다.

"더 늦기 전에." 짧은 문장이 그가 스스로에게 내놓을 있는 유일한 대답이었다.

높은 자리도, 다달이 꼬박꼬박 들어오던 월급도, 언제부턴가 그의 안을 채우지 못했다.

도시의 삶이란 결국 자신을 갉아먹는 소모에 지나지 않았음을, 그는 뒤늦게 인정했다.

그는 오래 미뤄 두었던 시골 할머니 댁으로의 올랐다.

열차가 도시의 잿빛 윤곽을 하나둘 지워 갈수록, 이상하게도 가슴이 조금씩 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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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2

할머니 댁은 세월에 기운 나무 나지막이 둘러선 작은 .

너머로는 서리를 밭이 아침 햇살에 희다 못해 눈부시게 반짝였다.

마을 사람들은 도시에서 낯선 청년을 은근한 눈길로 훑었다.

오래전 땅을 헐값에 사들이곤 등을 돌린 도시 사람들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지훈은 한참 뒤에야 알았다.

처음 며칠간 그는 도시의 방식이 옳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다분히 젊은이였다.

자루 제대로 쥐지 못하면서도 그는 농사일 따위 주면 익히리라 여겼다.

그러나 근거 없는 자신감은 사흘이 되어 뿌리째 .

허리 펴지 못한 반나절을 밭에 엎드리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무엇을 얕보았는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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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3

할머니는 여든을 넘기고도 여전히 분이어서, 새벽마다 누구보다 먼저 밭에 나섰다.

그러나 굽을 대로 굽은 허리는 이미 예전의 허리가 아니었다.

지훈은 멀리 산다는 핑계 뒤에 숨어, 할머니의 늙어 감을 오래도록 터였다.

서리가 내리기 전에 거두어야 , 당장 눈앞의 과제로 다가왔다.

일손은 턱없이 모자랐고, 할머니 홀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양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지훈은 흙과 땀으로 이루어진 진짜 노동에 .

손바닥은 부르터 터질 지경이었고, 손톱 밑은 까맣게 물들어 갔다.

그럼에도 밭에서 돌아온 저녁이면, 그는 오랜만에 허기라 부를 만한 허기를 느꼈다.

몸은 고단하기 그지없었으나, 머릿속을 짓누르던 소음은 어느새 잦아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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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4

어느 저녁, 옆집 노인이 사립문을 밀고 들어와 봉지를 내밀었다.

" 쑤시는 데엔 이만한 없어." 노인은 무뚝뚝하게 한마디를 던지고는 돌아섰다.

놀랍게도 할머니의 오랜 통증에 뚜렷한 보였다.

며칠 지훈은 말없이 사립문 앞에 개를 놓아두었고, 노인은 척도 않고 그것을 슬그머니 집어 갔다.

도시에서는 좀처럼 느껴 보지 못한, 이웃과 이웃 사이의 그곳에는 살아 있었다.

앞에서, 마을을 향해 걸어 잠갔던 그의 마음의 스르르 풀렸다.

마을의 오랜 녹인 것은 뜻밖에도 아이였다.

학교에서 논술 숙제만 나오면 울상을 짓는다는 옆집 아이에게, 지훈은 저녁마다 글쓰기를 주기로 했다.

아이가 생각을 조리 있게 , 그는 서두르지 않고 문장씩 함께 다듬어 갔다.

받아쓰기를 하다 말고, 지훈은 아이가 번번이 틀리는 낱말의 손끝으로 가만히 금을 그어 보였다.

편의 글을 붙들고 저녁 내내 끙끙대던 아이는, 머잖아 씨름하는 시간을 반으로 냈다.

아이의 서툰 문장이 조금씩 여물어 무렵, 마을 사람들의 눈빛도 어느새 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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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5

겨울이 코앞에 이르렀을 때, 지훈은 마을 어귀에 칸을 얻어 아예 눌러앉았다.

얼마 되지 않는 였지만, 새로 시작하는 그의 삶에는 차고도 넘쳤다.

한때 그는 이런 마을이야 머잖아 소리 없이 거라 여겼었다.

그러나 젊은이가 하나둘 돌아오기 시작하면서, 말은 조금씩 빛을 잃어 갔다.

마을의 오래된 '해가 가장 먼저 드는 골짜기'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지훈은 오랜 세월 잊혀 있던 어귀의 낡은 표지판에 손수 다시 새겼다.

언젠가부터 그는 세상의 부질없는 소음을 스스로 알게 되었다.

끝없이 무언가를 좇던 욕심을 나니, 삶은 오히려 더없이 또렷해졌다.

봄이 오기 전, 도시의 동료 하나가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왔다.

묻은 손으로 담담히 웃는 그의 얼굴을 보고, 동료는 부러움에 한동안 말을 잃었다.

무엇이 사람을 이토록 바꿔 놓았는지, 변화가 참으로 동료는 번이고 고개를 저었다.

낡은 안에서, 지훈은 비로소 오래 찾아 헤매던 제자리를 찾은 듯했다.

도시에서의 높은 이따금 그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땅이 건넨 평온만은, 그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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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cabulary

Grammar notes

-았/었음을nominalizes a past clause as an object: '(admitted) that ~ had been so'

도시의 삶이란 결국 자신을 갉아먹는 긴 소모에 지나지 않았음을, 그는 뒤늦게 인정했다.

City life, he admitted belatedly, had in the end been nothing but a long attrition eating away at him.

-다 못해beyond the point of ~; so ~ that it turns into something more

울타리 너머로는 서리를 인 밭이 아침 햇살에 희다 못해 눈부시게 반짝였다.

Beyond the fence, the frost-laden fields shone white past whiteness in the morning sun.

-(으)ㄴ 채(로)while remaining in a certain state; with something left as it is

허리 한 번 펴지 못한 채 반나절을 밭에 엎드리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무엇을 얕보았는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Only after a half-day bent over the field without once straightening his back did he grasp, to the bone, what he had underestimated.

-(으)ㄹ 지경이다to the point of ~; on the verge of an extreme

손바닥은 부르터 터질 지경이었고, 손톱 밑은 까맣게 물들어 갔다.

His palms blistered to the point of bursting, and the undersides of his nails stained black.

-기 그지없다utterly, boundlessly ~ (there is no end to it)

몸은 고단하기 그지없었으나, 머릿속을 짓누르던 소음은 어느새 잦아들어 있었다.

His body was weary beyond measure, yet the noise that had pressed on his mind had, at some point, gone qui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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