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들러리도 아닌

TOPIK 5#38 · Family & people

누구의 들러리도 아닌

No One's Bit Player

Part 1

가장 값비싼 회의는 대개 밤에 열렸고, 그런 자리에서 나는 남의 판에 끼어든 .

그날 밤도 나는 유럽 회사와의 자료를 화면에 띄워 놓고, 회의실 끝자리에서 숫자만 지키고 있었다.

수주가 걸린 금액은 수천만이어서, 원화로 환산하면 평생 연봉을 합쳐도 닿지 못할 액수였다.

상석에는 바닥에서 가장 인사들이 둘러앉아, 나로서는 짐작조차 어려운 결정을 주고받았다.

그들 앞에서 나는 발언권도 없이, 그저 자료를 넘기고 계산을 확인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휘황한 방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지경이어서, 나는 자꾸 재킷 주머니 낡은 차가운 테두리를 엄지로 매만졌다.

회의가 길어질 무렵, 상무 사람이 의자를 바싹 끌어 옆에 붙어 앉았다.

그는 화면 단가 하나를 손끝으로 짚더니, 숫자만 살짝 손보면 우리 것이라고 낮게 속삭였다.

거짓으로 따낸 수주가 무엇을 뜻하는지 나는 알았지만, 그의 말투에는 거절을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운 무게가 실려 있었다.

얼른 대답하지 못하고 다시 매만지는 사이, 기억은 이십 년을 훌쩍 거슬러 낡은 아파트로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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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2

할머니는 오래된 아파트에서 초록빛 마리와 단둘이 사셨다.

맞벌이 부모 밑에서 집에 맡겨진 나는 할머니의 하나뿐인 , 해를 좁은 거실에서 보냈다.

사람 말을 또박또박 흉내 냈는데, 이름 자를 익히는 데만 꼬박 철이 걸렸다.

겨울이면 할머니는 듬뿍 저며 넣은 차를 끓이셨고, 알싸한 냄새가 커튼과 이불에까지 배어들었다.

나는 매운 김을 호호 불며, 서툴게 굴리는 이름을 따라 소리 내어 웃곤 했다.

늙은 새는 이따금 텔레비전 소리나 초인종까지 흉내 내어, 할머니와 나를 감쪽같이 속이기도 했다.

그렇게 따뜻한 집이었지만, 할머니 앞에서는 어린 나도 함부로 떼를 쓰지 못했다.

할머니에게는 어린애의 단번에 잠재우는 무언가가 있어서, 눈길만 스쳐도 나는 하던 장난을 멈추었다.

그럴 때면 요란하던 목을 움츠리고 조용해졌다.

조용한 집에서 나는, 사랑이란 요란하지 않아도 되는 것임을 말보다 먼저 몸으로 익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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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3

조용한 무엇인지, 나는 어느 겨울 사탕 때문에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나는 할머니 몰래 사탕을 훔쳐 먹고는, 하도 소란을 피우길래 새가 떨어뜨린 거라고 얼결에 둘러댔다.

할머니는 아무 없이 나를 한참 .

없는 눈빛이 마치 것처럼 얼얼해서, 나는 자리에서 사라지고만 싶었다.

이윽고 할머니는 나직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집에서 거짓만은 결코 없다고 이르셨다.

없이 오직 한마디와 눈빛만으로, 할머니는 안의 무엇인가를 영영 곧게 세워 놓으셨다.

신기하게도 그날은 수다스럽던 입을 다문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뒤로 나는 다시 누구에게도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할머니의 앞에서 세운 훗날 유리 회의실에서 되살아나리라고는, 그때의 나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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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4

할머니는 나고 자랐으나, 전쟁으로 말미암아 열일곱에 홀로 고향을 등져야 했다.

가득 실은 몸을 싣고 바다를 건넌 뒤로, 배는 다시 북으로 오르지 못했다.

그래서 할머니에게 고향은 존재하는 곳이었다.

직접 가서 없는 그곳을, 할머니는 언제나 "누가 그러는데", "그렇다고들 하더라" 하는 남의 말에 기대어 더듬더듬 그려 보이셨다.

할머니는 이따금 빛바랜 사진 장을 방바닥에 , 손끝으로 얼굴을 하나하나 짚으며 옛사람들의 안부를 전하듯 이야기하셨다.

사진 속에는 내가 이름조차 모르는 얼굴들이, 오랜 손길에 뿌옇게 닳도록 바래 있었다.

그러나 어떤 사진보다도 할머니가 아끼신 것은, 작은 꽃무늬가 새겨진 낡은 .

손목에서 한시도 풀지 않던 , 타고 바다를 건너온 유일한 .

세상을 뜨기 얼마 전, 할머니는 풀어 손바닥에 슬며시 쥐여 주셨다.

그해 가을 할머니의 몸에서 발견되었고, 의사의 말은 길고 조심스러웠으나 요지는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병상에서도 흐트러짐 없이, 마지막 순간까지 서늘한 잃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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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5

돌이켜 보면, 훈련을 마치고 군복 차림으로 찾아뵌 어느 날, 할머니는 나를 두고 이제 제법 하셨다.

남의 인생에서는 같던 내가, 할머니 앞에서만은 사람 몫을 하는 어른으로 있는 듯했다.

상무의 속삭임 앞에서 내가 끝내 펜을 들지 못한 것은, 할머니가 나를 그렇게 길러 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낮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숫자만은 고칠 없다고 말했다.

상무는 나를 어릴 거짓말하던 나를 할머니가 바라보던 바로 눈빛으로, 그러나 정반대의 뜻을 담아.

같은 눈빛이 한쪽에서는 거짓을 꾸짖고 다른 쪽에서는 정직을 나무라는 광경을, 나는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

그날 이후 나는 굵직한 자리에서 조용히 밀려났고, 끝내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갔다.

남들 눈에 나는 요령 없는 남았지만, 적어도 안의 끝내 팔아넘기지 않았다.

이제 나는 안다, 낡은 손목에 두르고 있는 나는 결코 누구의 아니라는 것을.

할머니가 사진을 방에서 나는 오늘도 끓이고, 기억 여전히 할머니의 이름을 또박또박 부른다.

Vocabulary

Grammar notes

-(으)로 말미암아owing to, on account of (a formal, literary marker of cause)

전쟁으로 말미암아 할머니는 열일곱에 홀로 고향을 등져야 했다.

Owing to the war, Grandmother had to turn her back on her hometown, alone, at seventeen.

-기에because, for (a formal/literary reason for what follows)

할머니가 나를 그렇게 길러 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It was possible only because Grandmother had raised me the way she had.

-길래because, seeing that (a colloquial reason, common in speech and casual recollection)

앵무새가 하도 소란을 피우길래 새가 떨어뜨린 거라고 둘러댔다.

Because the parrot was raising such a racket, I blurted that the bird had knocked it down.

-는 한as long as, so long as (states the condition under which something holds)

이 낡은 팔찌를 손목에 두르고 있는 한 나는 누구의 들러리도 아니다.

As long as I wear this worn bracelet on my wrist, I am no one's bit player.

-(으)ㄹ 지경이다to the point of, on the verge of (an extreme state)

그 방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Just sitting in that room was enough to leave me on the verge of suffocating.

반어와 함축 (irony & subtext)meaning carried beneath the surface: the same glare condemns a lie in one scene and honesty in the other

상무는 어릴 적 할머니가 거짓말하던 나를 바라보던 바로 그 눈빛으로, 그러나 정반대의 뜻을 담아 나를 째려보았다.

The director glared at me with the very gaze Grandmother once turned on my lying child-self, yet freighted with the opposite mea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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