닳지 않는 것
What Doesn't Wear Thin
된 지 반년 만에, 나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닳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상사는 매일 아침 분 단위로 쪼갠 내 책상에 올려 두었고, 나는 그 빈칸을 메우는 기계가 된 기분이었다.
그렇게 반년을 보내고 나니, 몸속에 부를 만한 것은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나는 사흘의 휴가를 받아 내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할아버지의 시골집으로 향했다.
산 하나를 통째로 등지고 홀로 앉은 그 집은, 이름 그대로 곳이었다.
마루 끝에 서면 골짜기 아래 마을의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낡은 돌담 위로는 한 마리가 겁도 없이 오르내렸다.
마당 한구석에는 흙이 잔뜩 묻은 한 자루가 아무렇게나 기대어 서 있었다.
헐렁한 차림의 할아버지는, 여든이 넘은 나이가 무색할 만큼 얼굴로 나를 맞았다.
도시에서 반년을 시달리다 온 나로서는, 그 넉넉한 웃음이 낯설다 못해 조금 얄밉기까지 했다.
Checkpoint quiz
2 questions on Part 1
저녁상을 물리고 나서, 할아버지는 삐걱대는 사다리를 타고 나를 데리고 올라갔다.
먼지 냄새가 밴 한편에는, 물건이라며 온 낡은 놓여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 안에서 얼굴이 보일 듯 말 듯 흐릿하게 그려진 하나를 조심스레 펼쳐 보이셨다.
수백 년은 족히 묵었을 그 종이가 찢긴 데 하나 없이 것이, 나로서는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 그러셨듯, 사람은 끝내 남을 속이지 않고 살아야 하는 법이다."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속으로는 저 낡은 것들을 시장에 내다 팔면 대체 얼마를 받을까 하는 셈을 하고 있었다.
도시의 반년은 무엇이든 값으로 버릇을 내게 남겨 놓은 터였다.
할아버지에게 그 물건들은 값이 아니라, 오로지 지켜야 할 약속으로만 보이는 듯했다.
낡았으되 그 , 할아버지의 마음도 세월에 조금도 상하지 않은 것 같았다.
Checkpoint quiz
2 questions on Part 2
이튿날 아침, 도시 말씨를 쓰는 낯선 사내 하나가 번들거리는 승용차를 몰고 산길을 올라왔다.
그는 자신을 소개하며,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물건을 자기에게 팔라고 넌지시 청했다.
그자가 미덥지 않아 이름이라도 검색해 보려 했지만, 하필 도시에 두고 온 탓에 내 휴대전화는 진작 꺼져 있었다.
그런데 마을 어귀 게시판에는, 바로 그 사내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박힌 붙어 있었다.
이웃 마을 노인들의 땅을 가로챈 조심하라고, 주민들이 손수 써 붙인 .
그 얼굴을 마주한 순간, 어릴 적 할아버지께 들었던 꾸중 하나가 불쑥 되살아났다.
우물가에서 물을 긷다 남을 , 또 사촌 형의 잘못을 나를 앉혀 놓고 타이르시던 그 목소리였다.
남을 뒤에서 작은 이득을 탐하는 버릇이, 자라면 결국 저런 되는 법이라던 그 말씀.
정작 할아버지는 조금도 언성을 높이지 않고, 오히려 웃으며 그 사내를 조용히 돌려보냈다.
"저런 사람은 벌하기보다, 스스로 부끄러워질 때까지 그냥 두는 편이 낫단다."
나 같으면 그 자리에서 당장 경찰을 불렀을 텐데, 그 담담함이 대체 어디서 오는지 나는 가늠할 수 없었다.
Checkpoint quiz
3 questions on Part 3
그날 오후, 마을에서는 조촐한 가을 열렸다.
할아버지의 손에 떠밀려, 나는 얼떨결에 편에 끼어 섰다.
양편의 힘이 어찌나 팽팽하던지, 두 판을 내리 겨루고도 끝내 승부는 .
이기지도 지지도 못하고 경기가 맥없이 끝나자, 나는 은근히 .
그런데 이상하게도, 승패도 가려지지 않은 그 싸움을 두고 마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배를 잡고 웃어 댔다.
그 웃음 속에 한참을 섞여 있다 보니,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슬그머니 우스워졌다.
해 질 녘에는 마당에 그러모은 마른 불을 놓았는데, 붉게 잎더미에서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할아버지는 불씨를 뒤적이며, 다 타고 남은 재가 이듬해 밭의 된다고 일러 주셨다.
이상하게도, 그 불가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동안 몸 어딘가에서 잃어버린 조금씩 되돌아오는 듯했다.
Checkpoint quiz
2 questions on Part 4
떠나기 전날 이른 아침, 마을 노인들은 집집을 돌며 빈 병과 폐지를 손수 있었다.
나도 할아버지를 따라 나서, 물건을 손수레에 나눠 싣느라 참으로 오랜만에 땀을 흘렸다.
알고 보니 할아버지는 그 일을 여러 해째 도맡아 오면서도, 시청이 주겠다는 표창만은 번번이 온 분이었다.
남 앞에 이름 석 자 내미는 일은 한사코 도, 남몰래 남을 돕는 일만은 결코 마다하지 않는 것이었다.
값으로 않는 그 마음이야말로 저 수백 년이나 지켜 온 힘이었음을, 나는 그제야 어렴풋이 깨달았다.
서울로 돌아가는 길, 할아버지는 당신이 입던 낡은 한 벌을 기어이 내 손에 쥐여 주셨다.
기차에 앉아 무릎에 얹어 둔 그 , 먼지와 타는 냄새가 어렴풋이 배어 나왔다.
그런데 돌아오는 이번 길만은, 늘 따라붙던 허탈함도 없이 조금도 않았다.
다시 그 분 단위 고단한 하루가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만, 이제 내게 생긴 이 쉬이 닳지는 않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차창 밖으로 도시의 밀려들 무렵, 나는 문득 그 집 돌담을 겁도 없이 오르내리던 떠올리고 있었다.
속이지 않고도 저토록 넉넉하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다시 시작될 도시의 하루가 조금은 견딜 만해졌다.
Checkpoint quiz
3 questions on Part 5
Vocabulary
Grammar notes
나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시골집으로 향했다.
Without telling a soul, I set out for the country house.
그 웃음이 낯설다 못해 조금 얄밉기까지 했다.
That smile was so unfamiliar it was almost annoying.
세종대왕의 얼굴이 보일 듯 말 듯 흐릿하게 그려져 있었다.
King Sejong's face was drawn so faint as to be barely visible.
그 물건들은 값이 아니라 지켜야 할 약속으로만 보이는 듯했다.
Those objects seemed to hold no price — only a promise to be kept.
이 원기가 쉬이 닳지는 않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I had a feeling this vitality would not wear thin so easily.
이름 내미는 일은 고사하면서도 남 돕는 일은 마다하지 않으셨다.
Even while declining to put his name forward, he never refused to help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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