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눈으로

TOPIK 5#40 · Art & music

흐린 눈으로

Through a Blur

Part 1

처음 무대에 오르기까지 분, 유나의 손끝은 단추 언저리에서 자꾸만 길을 잃었다.

오랜 세월 꿈꿔 코앞인데도, 설레기는커녕 앞이 캄캄하기만 했다.

사실 유나는 어릴 적부터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으며 자랐다.

. 좀처럼 떼어지지 않는 오래된 이름표였다.

분장실이라고는 거울 하나와 낡은 의자가 전부인 좁은 방이었고, 구석의 작은 전기난로가 꽂혀 손을 데우고 있었다.

손이 얼음장 같았지만, 온몸의 떨림이 추위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그녀 자신이 가장 알았다.

무대 감독은 단원들을 불러 세워 놓고 하나하나 짚어 나갔다.

오래 손보지 않은 경사 무대라 발밑이 고르지 못하니, 정해진 발이라도 벗어나서는 된다고 그는 힘주어 말했다.

유나는 말을 새기면서도, 정작 두려운 것은 무대가 아니라 자신을 겨눌 수백 개의 시선이라는 사실을 애써 삼켰다.

무대에 오를 시간이 다가올수록, 오래전에 들었던 어떤 목소리 하나가 자꾸만 귓가로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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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2

부모가 도시로 돈을 벌러 떠난 뒤, 유나의 어린 시절은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할머니의 낡은 농가에서 오롯이 흘러갔다.

늙은 마리가 있었는데, 없는 짐승은 어린 유나에게 둘도 없는 동무였다.

유나는 나면서부터 심해, 눈앞의 세상이 뿌옇게 번져 보였다.

그런 흐린 눈으로도 그녀는 그리겠다며 노란 좀처럼 손에서 놓지 않았다.

뿔은 비뚤고 다리는 제멋대로인 그림은 누가 봐도 우스꽝스러웠지만, 할머니는 부엌 문에 그것을 붙여 두고 세상에 하나뿐인 명작이라 불렀다.

겁이 많은 아이였음에도 유나는 좀처럼 내지 않았고, 할머니는 지나친 얌전함을 도리어 마음에 걸려 했다.

밤이 이슥해지면 할머니는 무릎에 손녀를 뉘고 나직나직 옛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옛날 옛적에 눈이 어두운 아이가 하나 살았단다. 남들이 보는 것을 마음으로 보던 아이였지."

"무엇이 그리 무섭느냐.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아라, 유나야."

네가 자꾸 겁을 내길래 할미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거란다 목소리를, 유나는 무대를 코앞에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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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3

도시로 올라와 무용단에 들어간 뒤로, 유나는 하루도 연습을 거른 적이 없었다.

발톱이 갈라지고 발목이 부어도 묵묵히 견뎠지만, 정작 그녀를 괴롭힌 것은 고된 훈련이 아니라 사람을 겉모습으로만 재려 드는 시선이었다.

선배는 유나의 얼굴을 두고 무대에 서기엔 인상이 약하다느니,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다.

"그 얼굴로 주목을 받고 싶으면 해야 하지 않겠니?"

유나는 사람을 겉모습으로 매기는 그런 태도라면 진저리가 나도록 .

그러던 어느 밤, 연습실 옆방에서 때아닌 술판이 벌어졌다.

잔뜩 취한 선배가 목소리를 높여 부리기 시작하자, 너머로 새어 나오는 말들은 갈수록 노골적이었다.

물을 마시러 나왔던 유나는 뜻하지 않게 대화를 말았다.

무대에서 유나를 슬그머니 , 미리 계략이었다.

순간 유나는 오래전 많던 아이로 되돌아간 온몸이 굳었다.

그러나 악의가 실은 선배 자신의 불안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그때의 유나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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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4

마침내 막이 오르고, 유나는 무대에 .

이번 파트너와 몸을 맞대는 유난히 많아, 많은 그녀에게는 자체로 하나의 시험이었다.

게다가 무대 바닥은 물기가 것처럼 , 발을 디딜 때마다 순간이 아슬아슬했다.

무대에 오르기 직전, 유나는 그래 왔듯 안경을 벗어 분장대 위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안경을 벗는 순간, 객석을 가득 메운 수백의 얼굴은 이름도 표정도 없는 부드러운 얼룩으로 뭉개졌다.

그녀를 평가하려던 눈도, 계략도, 흐릿한 속에서는 아무런 힘을 갖지 못했다.

바로 순간, 흐린 눈으로 세상을 또렷이 보라던 할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되살아났다.

음악이 흐르자 유나의 몸은 두려움을 잊은 채, 물결이 유연하게 흘러갔다.

파트너의 손이 허리에 닿아도, 그녀는 이상 움츠러들지 않았다.

무대 위의 그녀는 적어도 동안만큼은, 누구도 부를 없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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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5

공연이 끝나고, 로비 한편에는 신인 들을 위한 조촐한 마련되어 있었다.

유나는 화려한 무대의상 위에, 시골에서부터 입어 낡은 그대로 걸치고 회견장에 나섰다.

기자가 그녀의 외모를 둘러싼 소문을 들추며, 생각은 없느냐고 물었다.

유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떨리지만 물러섬 없는 목소리로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것은 뿐,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지금껏 그녀의 삶은 울타리 안에서만 웅크려 나날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울타리를 넘어, 앞도 보이지 않는 자신의 스스로 걸어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를 선배는, 회견장 어디에서도 끝내 보이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신문에는 흐릿한 눈으로 세상을 껴안은 신인 사진이 큼직하게 실렸다.

노란 서툴게 그리던 소녀의 꿈이, 마침내 무대 위에서 활짝 피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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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cabulary

Grammar notes

~단다/~란다 (storytelling)warm, confiding narration to a listener — 'you know, once there was…'; used by an elder telling a tale

옛날 옛적에 눈이 어두운 아이가 하나 살았단다.

Long, long ago there lived a child with dim eyes, you know.

한다체 대화 (-느냐/-아라)plain-style speech acts — a plain question (-느냐) and command (-아라), the register an elder uses to a child

무엇이 그리 무섭느냐.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아라.

What is there to be so afraid of? Look with your heart, not your eyes.

-길래 (colloquial because)because, seeing that (colloquial reason for the speaker's own action)

네가 자꾸 겁을 내길래 할미가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거란다.

Because you keep getting scared, this old grandmother tells you this story.

-(으)로 말미암아 (owing to)owing to, on account of (a literary marker of cause)

그 악의가 실은 선배 자신의 불안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유나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Yuna failed to grasp that the malice in fact sprang from the senior's own insecurity.

-기에 (formal/literary because)because, for (a formal, written-register reason)

무대 바닥은 물기가 밴 것처럼 미끈미끈하기에, 매 순간이 아슬아슬했다.

Because the stage floor was slippery as if it held water, every moment was precario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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