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눈으로

흐린 눈으로 Through a Blur

Part 1

처음 무대에 오르기까지 십 분, 유나의 손끝은 새 단추 언저리에서 자꾸만 길을 잃었다.

오랜 세월 꿈꿔 온 코앞인데도, 설레기는커녕 앞이 캄캄하기만 했다.

사실 유나는 어릴 적부터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으며 자랐다.

. 좀처럼 떼어지지 않는 오래된 이름표였다.

분장실이라고는 거울 하나와 낡은 의자가 전부인 좁은 방이었고, 구석의 작은 전기난로가 꽂혀 언 손을 데우고 있었다.

손이 얼음장 같았지만, 온몸의 떨림이 추위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그녀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무대 감독은 단원들을 불러 세워 놓고 하나하나 짚어 나갔다.

오래 손보지 않은 경사 무대라 발밑이 고르지 못하니, 정해진 한 발이라도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그는 힘주어 말했다.

유나는 그 말을 새기면서도, 정작 두려운 것은 무대가 아니라 자신을 겨눌 수백 개의 시선이라는 사실을 애써 삼켰다.

무대에 오를 시간이 다가올수록, 오래전에 들었던 어떤 목소리 하나가 자꾸만 귓가로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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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2

부모가 도시로 돈을 벌러 떠난 뒤, 유나의 어린 시절은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할머니의 낡은 농가에서 오롯이 흘러갔다.

늙은 한 마리가 있었는데, 말 없는 그 짐승은 어린 유나에게 둘도 없는 동무였다.

유나는 나면서부터 심해, 눈앞의 세상이 늘 뿌옇게 번져 보였다.

그런 흐린 눈으로도 그녀는 그리겠다며 노란 좀처럼 손에서 놓지 않았다.

뿔은 비뚤고 다리는 제멋대로인 그 그림은 누가 봐도 우스꽝스러웠지만, 할머니는 부엌 문에 그것을 붙여 두고 세상에 하나뿐인 명작이라 불렀다.

겁이 많은 아이였음에도 유나는 좀처럼 내지 않았고, 할머니는 그 지나친 얌전함을 도리어 마음에 걸려 했다.

밤이 이슥해지면 할머니는 무릎에 손녀를 뉘고 나직나직 옛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옛날 옛적에 눈이 어두운 아이가 하나 살았단다. 남들이 못 보는 것을 마음으로 보던 아이였지."

"무엇이 그리 무섭느냐.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아라, 유나야."

네가 자꾸 겁을 내길래 할미가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거란다 — 그 목소리를, 유나는 무대를 코앞에 둔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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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3

도시로 올라와 무용단에 들어간 뒤로, 유나는 하루도 연습을 거른 적이 없었다.

발톱이 갈라지고 발목이 부어도 묵묵히 견뎠지만, 정작 그녀를 괴롭힌 것은 고된 훈련이 아니라 사람을 겉모습으로만 재려 드는 시선이었다.

한 선배는 유나의 얼굴을 두고 무대에 서기엔 인상이 약하다느니,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다.

"그 얼굴로 주목을 받고 싶으면 해야 하지 않겠니?"

유나는 사람을 겉모습으로 값 매기는 그런 태도라면 진저리가 나도록 .

그러던 어느 밤, 연습실 옆방에서 때아닌 술판이 벌어졌다.

잔뜩 취한 그 선배가 목소리를 높여 부리기 시작하자, 벽 너머로 새어 나오는 말들은 갈수록 노골적이었다.

물을 마시러 나왔던 유나는 뜻하지 않게 그 대화를 말았다.

무대에서 유나를 슬그머니 , 미리 짜 둔 계략이었다.

순간 유나는 오래전 그 겁 많던 아이로 되돌아간 듯 온몸이 굳었다.

그러나 그 악의가 실은 선배 자신의 불안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그때의 유나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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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4

마침내 막이 오르고, 유나는 첫 무대에 .

이번 파트너와 몸을 맞대는 유난히 많아, 겁 많은 그녀에게는 그 자체로 하나의 시험이었다.

게다가 무대 바닥은 물기가 밴 것처럼 , 발을 디딜 때마다 매 순간이 아슬아슬했다.

무대에 오르기 직전, 유나는 늘 그래 왔듯 안경을 벗어 분장대 위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안경을 벗는 순간, 객석을 가득 메운 수백의 얼굴은 이름도 표정도 없는 부드러운 얼룩으로 뭉개졌다.

그녀를 평가하려던 눈도, 계략도, 흐릿한 빛 속에서는 아무런 힘을 갖지 못했다.

바로 그 순간, 흐린 눈으로 세상을 더 또렷이 보라던 할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되살아났다.

음악이 흐르자 유나의 몸은 두려움을 잊은 채, 물결이 유연하게 흘러갔다.

파트너의 손이 허리에 닿아도, 그녀는 더 이상 움츠러들지 않았다.

무대 위의 그녀는 적어도 그 몇 분 동안만큼은, 누구도 부를 수 없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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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5

공연이 끝나고, 로비 한편에는 신인 들을 위한 조촐한 마련되어 있었다.

유나는 화려한 무대의상 위에, 시골에서부터 입어 온 낡은 그대로 걸치고 회견장에 나섰다.

한 기자가 그녀의 외모를 둘러싼 소문을 들추며, 할 생각은 없느냐고 물었다.

유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떨리지만 물러섬 없는 목소리로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것은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지금껏 그녀의 삶은 울타리 안에서만 웅크려 온 나날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그 울타리를 넘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자신의 스스로 걸어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를 그 선배는, 회견장 어디에서도 끝내 보이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신문에는 흐릿한 눈으로 세상을 껴안은 한 신인 사진이 큼직하게 실렸다.

노란 서툴게 그리던 소녀의 꿈이, 마침내 무대 위에서 활짝 피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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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cabulary

Grammar notes

~단다/~란다 (storytelling)warm, confiding narration to a listener — 'you know, once there was…'; used by an elder telling a tale

옛날 옛적에 눈이 어두운 아이가 하나 살았단다.

Long, long ago there lived a child with dim eyes, you know.

한다체 대화 (-느냐/-아라)plain-style speech acts — a plain question (-느냐) and command (-아라), the register an elder uses to a child

무엇이 그리 무섭느냐.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아라.

What is there to be so afraid of? Look with your heart, not your eyes.

-길래 (colloquial because)because, seeing that (colloquial reason for the speaker's own action)

네가 자꾸 겁을 내길래 할미가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거란다.

Because you keep getting scared, this old grandmother tells you this story.

-(으)로 말미암아 (owing to)owing to, on account of (a literary marker of cause)

그 악의가 실은 선배 자신의 불안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유나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Yuna failed to grasp that the malice in fact sprang from the senior's own insecurity.

-기에 (formal/literary because)because, for (a formal, written-register reason)

무대 바닥은 물기가 밴 것처럼 미끈미끈하기에, 매 순간이 아슬아슬했다.

Because the stage floor was slippery as if it held water, every moment was precario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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