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 걷힌 아침

TOPIK 5#43 · Family & people

서리 걷힌 아침

The Morning the Frost Lifted

Part 1

하얗게 내려앉은 아침, 옥분 할머니는 홀로 앉아 말없이 하고 있었다.

손끝에서 털실이 풀려 나가는 동안에도, 할머니의 마음은 자꾸만 대문 밖으로 달려 나가곤 했다.

오늘은 기나긴 끝에 작은아들이 드디어 세상으로 돌아오는 날이었다.

서울에서 회사에 다니는 손녀 수아도 며칠 내어 할머니 곁으로 내려와 있었다.

수아는 어릴 적부터 할머니의 옛이야기와, 평생 낡은 사진첩을 유난히 좋아했다.

손때 묻은 사진첩에는 집안의 흑백으로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건 아주 옛날, 내가 시집온 몸으로 까지 흘러갔을 이야기란다."

할머니는 사진 위를 손끝으로 천천히 쓸어내리며 옛일을 더듬었다.

전쟁이 터지자 식구가 되어, 낯선 도시의 몸을 싣고 정처 없이 떠돌았다고 했다.

"그때는 다들 그렇게 하루하루 목숨만 붙들고 살았단다." 할머니의 목소리가 나직이 잦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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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2

점심 무렵, 마당을 덮고 있던 햇살에 스르르 시작했다.

이윽고 대문이 삐걱 열리고, 끝내고 작은아들이 야윈 얼굴로 마당에 들어섰다.

할머니는 밤새 뜨던 목도리를 얼른 풀어, 앙상해진 그의 목에 둘러 주었다.

소식을 들은 어른들도 하나둘 조용히 마당에 들어 묵묵히 그의 곁에 섰다.

그런데 한쪽 구석에서는 사촌 조카 민호가 잔뜩 뾰로통한 얼굴로 있었다.

혼자만 잔치에서 밀려난 데다, 며칠 받아 형편없는 시험 까지 감추느라 종일 심통이 있던 것이다.

삼촌은 그런 조카에게 슬며시 다가가 나직이 물었다. "이놈, 무엇이 그리 못마땅해 잔뜩 ?"

"종일 나만 노려보길래, 큰맘 먹고 아껴 주려던 참이었다. 옜다, 어서 받아라."

삼촌이 눈깔사탕 하나를 손에 쥐여 주자, 아이의 뾰로통하던 입매가 슬며시 풀렸다.

부엌에서는 부쳐 고소한 냄새가 가득 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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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3

저녁상을 물린 뒤, 할머니는 목소리를 한결 낮추어 오래 묵은 이야기 하나를 꺼냈다.

작은아들이 그렇게 옥에 끌려간 데에는,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사연이 있었다.

정작 진짜 죄를 지은 자는 자취를 감추었고, 세상은 그를 대신 붙잡아 버린 셈이었다.

무렵부터 마을에는 집안에 씌었다는 흉흉한 소문이 안개처럼 번져 갔다.

밤이 이슥하면 뒷산 언저리에 허연 어른거린다고, 사람들은 저마다 목소리를 죽였다.

죽은 조상의 아직 구천을 떠도는 것이라고들 했다.

할머니는 그것이 부질없는 헛소리라며 쳤다.

"죽은 이를 두려워 말고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면, 쯤은 절로 물러가는 법이란다."

그날 이야기에 잔뜩 겁을 먹은 민호가 이불 속으로 파고들자, 삼촌이 곁에 누웠다.

"뭐가 그리 무서워 그러느냐. 삼촌이 밤새 지켜 터이니, 아무 걱정 말고 어서 자려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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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4

이튿날 새벽, "다들 채비하고 뒷산에 함께 올라가자." 하는 할머니의 말에 식구들은 말없이 뒤를 따랐다.

다시 하얗게 내려앉은 밟으며, 그들은 느린 걸음으로 산길을 올랐다.

앞에 다다르자, 삼촌은 품에서 오래 편지 통을 꺼내 성냥을 그었다.

편지는 진짜 범인이 죽음을 앞두고서야 뒤늦게 적어 보낸 였다.

놀랍게도 그는 죄를 낱낱이 서류까지 관청에 남겨 눈을 감은 뒤였다.

덕분에 삼촌의 결백을 뒷받침할 기록들이 마침내 세상 밖으로 드러났다.

오랜 세월 그를 옭아매던 마저, 아침 녹아내리듯 서서히 갔다.

할머니는 기쁜 소식을 동네에 떠벌리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눌러 삼켰다.

다만 아들의 거칠고 야윈 손을, 그저 오래도록 말없이 감싸 쥐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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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5

저물어 가는 마지막 아침, 수아는 읍내로 나가는 첫차에 몸을 실었다.

차창 밖으로 하얀 뭉게구름이 강물처럼 유유히 있었다.

문득 그녀의 눈앞에, 되어 낯선 거리를 떠돌았다던 할머니의 젊은 날이 겹쳐 왔다.

사실 수아는 요즘, 안정된 회사를 길을 가야 할지 밤마다 홀로 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바람을, 그녀는 오래도록 마음 한구석에 꼭꼭 두기만 했다.

지난밤에도 그녀는 할머니가 젊어 흥얼거리던 노래들을 하나하나 골라 표를 만들어 두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곡을 고르고 있을 때만큼은, 가슴속에 오래 잠자던 무언가가 조용히 깨어나는 같았다.

해를 옥에 갇혀 지낸 삼촌도, 전쟁조차 끝내 꺾지 못한 할머니도 저리 , 정작 마음 하나 스스로 사람은 자신이 아닌가 싶었다.

창밖 구름은 여전히 어디론가 유유히 , 어느새 수아의 마음도 곁을 따라 가벼이 흘렀다.

그녀는 품속 깊이 넣어 꺼내, 접힌 자리를 손끝으로 반듯이 보았다.

오래 묵은 망설임이 아침 처럼 말갛게 , 그녀는 언젠가 할머니의 손을 잡고 거리를 나란히 걸어 보리라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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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cabulary

Grammar notes

~단다/~란다a warm storyteller's ending used with an intimate listener — 'you know…', softening a recollection

그때는 다들 그렇게 하루하루 목숨만 붙들고 살았단다.

In those days, you know, everyone just held on to their bare life, one day at a time.

-(으)려무나/-렴a gentle, affectionate imperative — 'go on and…'

아무 걱정 말고 어서 자려무나.

Don't worry about a thing — go on now and sleep.

한다체 대화 (-느냐/-아라/-자)plain-style speech acts — a question, command, or proposal — in intimate family talk

무엇이 그리 못마땅해 잔뜩 삐쳤느냐?

What's got you so put out and sulking?

-길래colloquial 'because / seeing that', giving the reason for the speaker's own response

종일 나만 노려보길래, 아껴 둔 걸 주려던 참이었다.

You've been glaring at me all day, so I was just about to give you what I'd saved.

자유간접화법 (free indirect style)narration that slips inside a character's own thought, without quotation marks

정작 제 마음 하나 스스로 가둔 사람은 자신이 아닌가 싶었다.

Wasn't she, in the end, the very one who had caged her own he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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