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뎌진 칼날을 갈며
Sharpening a Dulled Blade
태호는 전공했건만, 정작 그가 몸담은 자리는 법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곳이었다.
작은 한구석에서, 그는 남이 넘긴 서류를 온종일 자판 위로 옮겨 적는 말단 직원에 지나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그날의 끝이 훤히 보이는 하루하루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빠져나올 수 없는 다르지 않았다.
종일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만이 텅 빈 사무실에 규칙적으로 울렸거니와, 그 단조로운 리듬은 어느새 그의 감각마저 만들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늦은 밤, 시골에 홀로 계신 할머니가 편찮으시다는 전화가 걸려 왔다.
그는 하루 이틀만 얼굴을 비치고 올라올 생각으로, 오랜만에 고향으로 향하는 차를 올렸다.
고향은 오래된 품에 낀, 이제는 인적마저 뜸해진 작은 바닷가 마을이었다.
마을 어귀의 낡은 빛바랜 하나가 걸린 채, 바닷바람에 힘없이 나부끼고 있었다.
차창을 내리자 비릿한 바다 냄새가 훅 끼쳐 왔고,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의 조금씩 마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Checkpoint quiz
2 questions on Part 1
할머니는 아픈 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엌에서 밥을 푸고 계셨다.
태호가 커다란 뜨거운 국을 떠 밥상에 올리자, 할머니는 오랜만에 손주와 마주 앉은 것이 그저 좋으신 듯 연신 웃으셨다.
밥을 먹다 말고, 그는 마당 한쪽에 조상을 모신 낡은 그대로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오랜 세월의 무게에 기둥은 위태롭게 기울고 지붕은 폭삭 내려앉아,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했다.
할머니는 눈을 감기 전에 저 원래 모습대로 두고 싶다는 말을, 지나가듯 그러나 힘주어 꺼내셨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이튿날 아침 서울로 돌아갔어야 했지만, 태호는 아무 말 없이 소매를 걷어붙였다.
우선 마당 구석에서 악취를 풍기는 낡은 헐어 내기로 했다.
오래 방치된 치우는 일은 상상보다 훨씬 고되어, 며칠 만에 그의 두 손바닥에는 붉은 여기저기 부풀어 올랐다.
그런데 찾아낸 날이 어찌나 지, 풀 한 포기 제대로 베어 내지 못했다.
Checkpoint quiz
3 questions on Part 2
태호는 한편에 놓인 꺼내, 오래도록 정성 들여 갈았다.
쓱쓱 날을 세우는 동안, 그는 지난 몇 년간 것이 비단 이 아니라는 생각에 잠겼다.
날카롭게 벼려진 마당의 억센 잡초를 단숨에 눕히는 순간,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돌아보니,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서연이 햇빛을 등지고 그와 있었다.
흙과 땀으로 뒤범벅이 된 몰골에, 손끝마다 잡힌 들킨 것 같아 그는 공연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사실 태호는 오래전부터 서연을 남몰래 왔으나, 그 마음을 늘 밑바닥에 가라앉히듯 감추어 두기만 했다.
서연은 어릴 적 둘이 손을 잡고 갔던 바닷가의 작은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넌 걸면서, 어른이 되면 꼭 다시 데려오겠다고 큰소리쳤잖아." 서연이 장난스레 그의 흙 묻은 어깨를 툭 쳤다.
두 사람은 겨울이면 꽝꽝 얼어붙은 위에서 흉내 내며 놀던 기억까지 끄집어내어 한참을 웃었다.
Checkpoint quiz
3 questions on Part 3
이튿날부터 서연은 제 일처럼 소매를 걷고 복원을 거들었다.
그녀는 태호의 손에서 연장을 건네받아 능숙하게 갈아 주기까지 했다.
기울었던 하나하나 제자리로 돌려놓는 작업은 더디었으나, 두 사람의 손이 맞을수록 조금씩 속도가 붙었다.
부엌에서는 할머니의 다시 밥을 펐고, 그 곁에서는 서연의 국을 저었으며, 그 소박한 소리들이 태호의 마음을 오래도록 어루만졌다.
마침내 새로 인 지붕 위로 깨끗한 깃발이 내걸려 바닷바람에 나부끼던 날, 온 식구가 사당 앞에 나란히 정성껏 절을 올렸다.
향 연기가 피어오르는 앞에서, 태호는 이 마을을 향한, 그리고 서연을 향한 제 마음이 결코 헛된 아니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서울로 돌아가 다시 온종일 두드리며 살아가는 삶은, 이제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며칠 뒤, 그는 오래 몸담았던 부쳤다.
Checkpoint quiz
2 questions on Part 4
계절이 한 차례 바뀌자, 태호는 마을 어귀에 작은 법률 상담소를 열었다.
대학 시절 파고들었던 지식이, 그제야 비로소 제 쓸모를 찾은 셈이었다.
첫 옆집에 홀로 사는 늙은 어부였다.
어부는 한편의 낡은 창고를 둘러싸고 이웃과 벌어진 오랜 다툼을, 반신반의하며 태호에게 맡겨 왔다.
태호는 두서없는 하소연을 밤늦도록 또박또박 정리해, 빈틈없는 서류로 꾸며 냈다.
소문이 퍼지자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그의 문을 두드렸고, 그토록 잔잔한 삶이 어느새 그의 것이 되어 있었다.
이듬해 봄, 태호는 서연에게 정식으로 마음을 굳혔다.
"저 총각이 드디어 ." 마을 어른들은 제 일처럼 기뻐하며 덕담을 아끼지 않았다.
혼례를 치르던 날, 두 사람은 어린 시절의 약속 그대로 마주 걸어 보였다.
신혼여행은 멀리 갈 것도 없이, 옛 추억이 고스란히 잠긴 그 바닷가 정했다.
돌아오는 길, 텅 빈 나란히 달리며 두 사람은 얼음판 위 시합 이야기로 또 한 번 깔깔 웃었다.
서울에서는 헤어날 길 없는 같던 하루하루가, 이 바닷가 마을에서는 잔잔한 물결처럼 순하게 흘러갔다.
Checkpoint quiz
2 questions on Part 5
Vocabulary
Grammar notes
낡은 전봇대에는 빛바랜 현수막 하나가 걸린 채 바닷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On the old utility pole a faded banner hung, left as it was, fluttering in the sea wind.
태호는 법학을 전공했건만, 정작 몸담은 자리는 법과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Taeho had majored in law, and yet the post he filled had nothing to do with it.
타자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울렸거니와, 그 단조로운 리듬이 그의 감각마저 무디게 만들었다.
Not only did the typing ring out steadily, but its monotonous rhythm was dulling even his senses.
할머니는 아픈 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엌에서 밥을 푸고 계셨다.
Despite her ailing body, Grandmother was still scooping rice in the kitchen.
두 사람의 손이 맞을수록 일에 조금씩 속도가 붙었다.
The more the two found a rhythm, the more the work picked up pace.
법학 지식이 그제야 비로소 제 쓸모를 찾은 셈이었다.
In effect, his knowledge of law had only then found its 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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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questions on the whole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