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호 없는 골목

TOPIK 5#56 · Holidays & events

구호 없는 골목

The Alley With No Slogans

Part 1

도윤이 설계한 배달 가입자 천만을 돌파하던 날, 회사는 성대한 축하연을 열었다.

무대에 오른 대표는 '우리는 이웃을 잇는다'는 창업 다시 한번 낭독했다.

박수가 쏟아졌지만, 정작 밤새워 만든 속은 이상하리만치 .

회의마다 임원들은 ''이라는 말을 근엄하게 되뇌었지만, 그것은 이미 닳고 닳은 지나지 않았다.

화면 ''이 번드르르해질수록, 앱의 수수료에 등골이 휘는 골목 가게들은 늘어만 갔고, 이모의 작은 식당도 그중 하나였다.

결국 그가 화면에 새겨 것은 이음이 아니라, 포장된 .

경쟁사가 파격적인 조건으로 그를 데려가려 했지만, 도윤은 이직 제안마저 뿌리치고 사표를 냈다.

그렇게 찾아든 이모의 식당은 골목 끝에 웅크린, 낡았어도 곳이었다.

이모는 조카의 사연 따위 궁금해하지도 않고 대뜸 반말로 쏘아붙였다.

"다 놈이 그리 죽을상을 하고 섰느냐? 사연은 됐고, 저기 바닥부터 닦아라."

도윤은 앞치마를 두르고, 태어나 처음으로 바닥을 .

서툰 손이 부끄러우면서도, 오래도록 그를 갉아먹던 단순한 노동 앞에서 조금씩 옅어졌기에, 그는 묵묵히 바닥에 무릎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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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ckpoint qui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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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2

며칠 저녁, 동생 도진이 처진 어깨로 식당에 들어섰다.

세미프로 축구 선수인 도진은 다음 시즌 라이벌 팀으로 되어 있었는데, 한솥밥을 먹던 동료들을 떠나는 것이 두려운 모양이었다.

형이라면 뭔가 대단한 조언을 법도 했지만, 도윤은 아무 없이 국밥 그릇을 그의 앞에 밀어 놓았다.

그러고는 어릴 형제만의 신호였던 대로, 한쪽 눈을 찡긋 보냈다.

별말 아니었는데도, 도진의 굳었던 낯이 조금 풀렸다.

마침 골목에서는 해마다 여는 코앞이었고, 이모는 조카를 준비에 냉큼 끌어들였다.

수백만 명에게 이벤트를 설계하던 그가 이번에 궁리한 것은, 커다란 굴려 나온 눈금만큼 손으로 뜯은 종이 쿠폰을 나눠 주는, 세상에서 가장 단순한 규칙이었다.

앱도 데이터도 없이 오직 운과 손맛으로 굴러가는 놀이인 셈이었다.

낮에는 앱의 호출을 받아 뛰던 배달 라이더 이웃들이, 문가에 벗어 두고 일손을 보탰다.

그중 하나는, 형이 하도 귀찮게 굴길래 나왔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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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3

골목은 아침부터 .

빌려 스피커에서는 트로트가 쿵쿵 울리고, 솥뚜껑 부딪는 소리와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뒤섞였다.

숯불 위에서 기름을 뚝뚝 떨구며 익어 가고, 한쪽에서는 기계가 분홍 구름을 피워 올렸다.

이모는 텃밭 채소로 무친 접시째 골목으로 연신 내보냈다.

사람들은 줄을 서서 굴리고, 나온 눈금만큼 종이 받아, 쿠폰으로 음식을 바꿔 갔다.

별점도, 배달 시간도, 최적화된 추천도 없이, 그저 얼굴과 얼굴이 음식을 주고받을 뿐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골목 안쪽 근처에는, 잔치의 가장자리를 맴도는 사내 하나가 있었다.

명수라는 이웃에게 누구도 선뜻 말을 붙이지 않기에, 그는 담배 연기 뒤로 비켜서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이모가 성큼 다가가, 군말 없이 접시를 안기고는 어서 먹으라 손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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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4

오후가 되자 골목 아이들이 무대에 올라, 누구나 아는 이야기 편을 서툴게 연기했다.

늑대가 왔다고 거짓말을 되풀이하다 끝내 아무도 믿어 주지 않게 된, 소년의 이야기였다.

도윤은 문득, 회의마다 ''을 외치던 회사가 소년 같다고 생각했다.

늑대, 늑대 하고 소년이 외치듯 회사는 , 상생 하고 외쳤고, 그렇게 말은 아무 무게도 없는 빈껍데기가 되어 버렸다.

무대 옆에서는 노인이 구성지게 뽑았다.

떠나는 이와 남는 이의 노래인 , 이적을 앞둔 도진의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머리에 얼굴을 어린 소녀가, 노인 곁에서 수줍게 노래를 따라 불렀다.

알고 보니 아이는, 잔치의 가장자리에 섰던 명수의 손녀였다.

도윤은 나중에야 명수가 젊은 신세를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골목은 일을 두고 번도 그를 낙인찍지 않았고, 해마다 그의 자리를 말없이 비워 두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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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5

스러질 무렵, 도진이 형에게 다가와 결국 마음을 굳혔다고 밝게 말했다.

그러고는 형이 그랬듯, 한쪽 눈을 찡긋 되돌려 주었다.

명수는 돌아가는 길에 도윤에게 짧게 고맙다는 말을 남겼고, 그의 손녀는 빗자루를 들고 남았다.

도윤이 골목을 늦도록 동안, 머리의 소녀가 곁에서 걸레를 헹궈 주었다.

"아저씨는 회사에서 하던 사람이에요?" 하고 소녀가 물었다.

도윤은 문득, ''라거나 ''이라는 말이 조금도 입에서 나오려 하지 않는다는 깨달았다.

회사는 번듯한 이름 하나를 주는 대신 그의 얼굴을 가져갔지만, 이제 그에게는 아이가 알아보는 얼굴과 얼굴을 불러 꾸짖는 이모가 있었다.

, 번드르르한 , 그는 조금도 그립지 않았다.

애초에 골목에는 것이 없었고, 그것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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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cabulary

Grammar notes

-기에because, for (a formal or literary reason)

누구도 선뜻 말을 붙이지 않기에, 그는 담배 연기 뒤로 비켜서 있었다.

Because no one readily spoke to him, he kept off behind his cigarette smoke.

-길래because, seeing that (a colloquial reason, in speech)

형이 하도 귀찮게 굴길래 나왔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He joked that he'd come out only because his hyung kept pestering him.

한다체 대화 (-느냐/-아라)plain-style banmal speech acts — a question or command ending used in dialogue

왜 그리 죽을상을 하고 섰느냐? 사연은 됐고, 저기 저 바닥부터 닦아라.

Why are you standing there with such a long face? Never mind the story — start by mopping that floor over there.

한자어 추상 (hanja-heavy abstraction)abstract Sino-Korean diction (이념·상생·위선·공허) carrying the story's conceptual weight

결국 그가 화면에 새겨 온 것은 이음이 아니라, 잘 포장된 위선이었다.

In the end, what he had inscribed on that screen was not connection but well-wrapped hypocrisy.

장단 리듬 (long/short sentence rhythm)a long, layered sentence deliberately followed by a short one for rhythm

별점도, 배달 시간도, 최적화된 추천도 없이, 그저 얼굴과 얼굴이 음식을 주고받을 뿐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With no star ratings, no delivery times, no optimized recommendations — just one face trading food with another. And that was enough.

Take the final quiz

3 questions on the whol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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